posted by 오리밭 2010. 5. 10.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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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시절를 아십니까?

요즘이야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다보면 젊은아이들은 귀에다M.P3를 귀에 꽂고

음악에 심취하여 미친놈 처럼 고개도 까닥까닥 하기도하고.혼자 흥얼흥얼 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핸드폰도 제마다 M.P3기능정도는 기본이여서 어디에서나 노래 다운만

받으면 커다란 디스크 없이도 내가 듣고싶은 노래를 맘대로 장소 불문하고

이어폰이란 놈으로 혼자만의 음악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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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한 때 고고 춤이 유행하던 시대에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게 유행이어서

친구들과 놀러 가거나 등산이라도 갈 때면 통기타나 야전(야외전축,휴대용)은 빠지지 않는

필수품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참 격세지-감[] 을 느끼게 됩니다.

-고고는 다 아시다시피 196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던 대중무용입니다.

허리와 된장통(?)를 마구흔드는 간단한 춤이지만 자유스럽게 출 수 있는 점과

재즈·로큰롤 등에 맞추어 출 수 있어 인기가 있었습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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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에 '빽판'을 걸어놓고 춤추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 ,

이 야외전축의 턴테이블에서는 한창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던 미국 밴드 C.C.R의

Hey Tonight, Molina 등을 연발 돌려 대는 시기였다.

60년대 트위스트가 젊은이들 음악 문화라고 이야기한다면 70년대가 바로 고고가

유행하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국내 고고의 대중적인 유행에 불을 당긴 것 중 하나는 바로 야전이

아니었을까 생각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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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야외전축은 노트북 컴퓨터처럼 가방 모양을 하여 , 건전지로 작동하는

포터블(휴대용) 가전제품으로는 트랜지스터 라디오(1955년 8월17일 생산)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꿈 같은' 상품이었다.

크기는 보통 LP음반보다 조금 긴 장방형에다가 높이는 10Cm정도였다.

자체스피커 하나(물론 Mono였다)와 회전조절 스위치(33/45)하나,

볼륨 스위치만 있었다. 좀 넉넉한 집안 학생들은 따로 스피커를 구해 연결하여

사용했다.(하지만 역시 모노였다).

전원은 AC110V와 DC9V를 사용했는데, 야외에 가지고 가려면 배터리 값이

만만치 않았다.

대부분 같이 사용할(?) 친구들끼리 갹출해서 배터리 값을 마련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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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교복 과 나팔바지 교련복,꽃무늬 ,물방울원색 남방으로 대표되는 그 시절

학교에서 소풍이라도 가는 날은 야전에 '빽판'을 걸어놓고 신나게 춤을 추었다 .

평소 학교에서 샌님,범생이로만 불리던 공부벌레들도 그날 만큼은 더 이상 약골샌님이 아니었다.

지직거리는 잡음이 적당히 섞인 레코드판 소리가 들리는 야전 앞에서 교모의

윗부분 한가운데를 일부러 찢은 뒤 다시 쓰는 파격미를 보이며 즐겁게 춤을 추었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인 진급과 더불어 야전시대의 호기심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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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고고,쌍권총,토기춤,허슬,....참 다양 하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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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얼마의시간이 흐른후...

 대학생들 사이에는 '고고 미팅'이란 것이 있었다.

'고고 미팅'이란 적당한 다방을 빌려서(주로 낮시간 이용) 단체로 미팅을 하는 것이었는데,

대개는 학과 대 학과 단위로 하였다.

이 '고고 미팅'에서는 '고고춤'을 추는 빠른 노래가 서너곡 나오고 나면 부르스 곡이 한 곡씩 나왔다.

그러면 다 같이 어설프게 부르스를 추곤 했었는데,

그런 사교춤에 익숙치 못한 학생들은 춤보다 장난에 더 정신을 팔곤 했다.

제일 흔한 놀이가 파트너 '브라자 끈 튕기기'였었다.

남자들은 춤을 추면서 과대표의 신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신호에 맞춰서 끈을 잡아당겼다가 튀기는 놀이였다. 그럼 사방에서 '타닥.. 타다닥..'하는 살 때리는 소리와 드물게는 '아얏'하는 소리도 들리곤 했었다.

참 좋은 놀이였었는데 전승이 제대로 안된 것 같아 아쉽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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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서울 명동과 충무로, 종로 일대는 말 그대로 '해방구'였다 .

거리는 하룻밤의 해방감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많은 청춘 남녀들이 밤새도록 거리를 배회하거나 고고장에서 몸을 흔들어댔다.

'고고파티'와 '그룹미팅'도 이때성행했다 .

이날 젊은이들의 실수로 태어난 아기들을 '크리스마스 베이비'라고 부르기도 했다 .

 해마다 성탄 비상경계령이 발동되어 경찰은 연중 가장 바쁜 날을 보내야 했다.

당시 크리스마스를 '크레이지마스'라고도 했다 .

나또한 꽤나 미친짓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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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는 30대·40대를 의식한 공연을 만나는 기회가 늘었다.

예를 들면 '7080 대학가요제 콘서트'라든가 '포크 페스티벌' 등

사오십대 중장년층을 겨냥한 공연들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래서 사오십대 중장년층을 새로운 문화 소비계층이 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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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70년대 말에 졸업시즌 이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고고장,디스코장을 기웃거리면서

민증 없다고 입구에서 문빵한테 "이사람아 방위가 민증가지고 다니냐 "

머리스타일 보면 몰라 라며 깐죽거리던 시절 무교동 낙지골목의 향수에 초저녁이면

매운 낙지볶음에 "캬" 소주 한잔 마시고 가보시끼 해서 쎄시봉 고고장 에서

 걸 한번 꼬셔보려고 작업했던 시절을 그리워 하십니까 고삐리 고고장에서 기술걸려면

중대 연극영화학과 가짜 학생증 가지고 작업하던 그런 시절을 기억 하십니까?

미드나이트가 끝나면 통금 무섭다고 만화방에 날 샐때까지 죽치던 암울했던 그시절의 추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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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박 긁어 모은 돈으로 전파상에서 빨간 색의 야전을 샀습니다.

 빨간 뚜껑을 열면 턴테이블이 있었고 라디오도 나왔습니다.

그날 이후 라디오에서만 들었던 음악을 야전으로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당시종로나 을지로통 세운상가에 올라가면

플레이보이,팬터하우스,야동 비디오 테이프,해적판(일명 ; 빽판)판매점이 많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팝송이란 팝송은 다 있었습니다.

물론 다 해적판, 일명 빽판들이었습니다.

한 장에 500원씩이었구요.

돈도 없었지만 스테레오도 안 되는 야전에 라이센스 판은 아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여간 나는 바늘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빽판을 돌리고 또 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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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밤의열기"-존 트랄불탈 야가 나오면서부터 (70년대말로 기억함)급격히

하강곡선을 그렸던 추억의 고고춤...

그후 이어지는 디스코의 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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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련한 그시절...

가진것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추억의 저편에 아스라이 자리잡고 있는

따뜻한 미소들이...아름답고 그립습니다.

편집후기....................


옛 노래와 추억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단순히 추억과 노래자체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그 노래를 함께 듣고 부르고 했던 사람들 , 그리고 그 추억의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살아냈던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닐까?

난 오늘도 낡은 녹음기에서 흘러 나오는 그 아련한 추억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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