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오리밭 2010. 5. 1. 18:39
명성황후가 시해된 옥호루
명성황후가 친러반일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자 일본은 옥호루에 난입하여 황후를 시해했다.
명성황후의 사건을 취재했던 미국(뉴욕 헤럴드) 기자가 기사를 본사로 송고하려하자 일본공사는 자신의 관련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전신국에 압력을 가해 송고를 방해했다. 부득이 상업전신국을 통해 유럽전신국을 거쳐 본사에 기사를 송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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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과 샬트수녀원[19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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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나룻배를 건조하던 장소로 유명하다.

줄무늬 상의를 입은 소년과 목판에 엿을 담은 어린 엿장수가 엿을 팔고 있다.

소년의 옷차림이 당시 유행에 민감했음을 보여준다.[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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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밖 풍경
태극기가 걸린 이유는 그날이 1907년 8월 27일 순종황제의 경운궁 즉위식 기념일이기 때문입니다.

돈의문의 현판이 선명하게 보이고, 전차선로가 그 사이로 뻗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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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밖 풍경! 동대문 왼편에 연기를 뿜고 있는곳은 화력발전소이고,좌, 우 초가집사이를 두고 전차 선로와 전주가 인상적입니다. 동대문 옹성벽이 희미하게 보이고, 그림자를 보아 오후 3시경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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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서울 전경(1930)
우측 원표시는 한국은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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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대문 전경(1900)
당시 전차궤도는 남대문안으로 부설되었고. 아침마다 나무장수들이 웅집하여 이 거리는 늘 소란하고 상품도 다양하였습니다.
남대문 부근의 칠패시장이 남대문시장의 효시가 되고 남대문 주변의 변천과정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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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전경(1900)
경복궁에서 근정전 다음가는 경회루(국보 224호)는 임진왜란때 소실 되었으나 대원군이1867 경복궁 재건시 복원, 오늘날의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48개의 석주위에 세운 누각은 외국사신의 연회에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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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화력발전소
미국인 콜브란이 1898년 한성화력발전소를 설립하면서 세운 것인데 전차를 운영하기 위해 세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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